11/21/2022

우리가 사랑하는 이 곳, 뉴욕

 우리가 사랑하는 이 곳, 뉴욕

        2020년 3월 12일 목요일, 회사에서 당장 내일부터 원격근무를 시작한다고 알렸다. 2월 29일 뉴욕에서 처음으로 코로나 확진자가 나타났지만 마지막 출근일까지도 나는 잠깐 지나가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한달 정도 지나면 다시 출근할 수 있겠지하고 동료들과 웃으면서 퇴근을 했고, 원격으로 회사 컴퓨터 접속은 잘 될까 정도만 걱정했다. 그리고 삼일 뒤 15일 오후에 뉴욕 시장이 모든 학교 수업을 원격으로 전환한다고 기자회견을 하면서 세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 3/17/2020: 뉴욕시 모든 음식점과 술집 영업 금지 (배달만 가능)
  • 3/22/2020: 뉴욕주지사의 이동제한령 시작
  • 4/11/2020: 뉴욕시 코로나 하루 사망자 775명
  • 6/24/2020: 뉴욕시 코로나 총 사망자 22,934명/ 확진자 227,517명
  • 7/6/2020: 레스토랑 outdoor dining 만 영업 가능

        

        정부의 대응 타임라인만 보면 2020년 여름부터 뉴욕의 상황이 조금 나아졌겠구나 싶지만 실제로 그 여파는 훨씬 더 심각하고 컸다. 우리 가족은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한 이 후 첫 외식을 2021년 6월에 했다. 약 1년 3개월동안 집밥과 배달음식만 먹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미국은 9월부터 새학기가 시작하는데 2020년 9월에 개학할 때 부모에게 선택의 기회를 넘겼다. 옵션은 100% 원격 아니면 하이브리드. 우리 가족은 100% 원격을 선택했고 이 얘기인 즉슨, 우리 아이들은 2020년 3월 중순에 원격 수업을 시작해 2021년 9월까지 1년 6개월을 학교에 단 하루도 등교하지 않았다. 우리 가족이 특별한 케이스는 아니다. 많은 가족들이 우리와 같은 선택을 했고 한국보다 훨씬 더 팬데믹의 여파가 심했다.

        이렇게 기나긴 고난의 시간이 시작될 지 그 3월에는 몰랐다. 하루 아침에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되서 오히려 일상은 차분해지고 조용해졌다. 느긋하게 일어날 수 있었고 천천히 아침 커피를 마실 수 있었고 아이들과 긴 아침 식사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우리집 밖 현실은 완전히 달랐다. 3월부터 5월까지 뉴욕의 봄은 끔찍하고 잔혹했다. 뉴욕은 코로나 앞에서 처참하게 무너졌다. 서너달의 짧은 시간동안 이 도시는 약 2만 5천명 정도의 사람을 잃었다.

출처: https://www.nyc.gov/site/doh/covid/covid-19-data-totals.page


        4월 초중순에는 뉴욕시에서만 하루 사망자가 800명이 넘게 나왔다. 집 밖으로 단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하루종일 집에서 아이들과 부대끼며 살 때 정말 몇 분에 한 번씩 앰뷸런스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살면서 그렇게 사이렌 소리를 자주 들어본 적이 없다. 그 때 잠자리에 누우면 아이가 귀를 막으면서 말했다.

“엄마, 귀에서 계속 앰뷸런스 소리가 울려”

        환청이 들리는 것이다. 하루에 수 십번 그 소리를 들으니깐. 그러면 아이를 꼭 안아줄 수 밖에 없었다. 나도 똑같이 그런 환청이 들렸다. 그래서 내일은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실려가고 죽을까 무서웠고 나도 무서워서 아이를 꼭 껴안을 수 밖에 없었다. 아이에겐 희망을 갖고 말했다. 내일은 조금 더 괜찮아 질거야. 내일은 사이렌 소리가 조금 덜 들릴거야.

11/15/2022

03 Thanks for being you

Thanks for being you

우리의 삶을 제로섬 게임이라고 하기엔 우리 모두는 너무 아름다운 존재이다.


        2006년에 ‘천하장사 마돈나’ 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고등학교 1학년인 오동구 (류덕환 배우)는 여자가 되고 싶었고, 성전환 수술비를 벌기 위해서 씨름부에 가입하고 상금이 있는 씨름 대회에 참가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너무 사랑스러운 성장 영화이고 모든 좋은 작품이 그렇듯이 울면서 웃으면서 볼 수 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내가 아직 또렷이 기억하는 동구의 대사가 있다.


“나는 뭐가 되고 싶은게 아니라 그냥 살고 싶은거야”

        

        나는 극장에서 이 장면을 보고 온 마음이 다 흔들렸고 눈물이 핑 돌았다. 오동구는 무엇이 되는 건 중요하지 않아, 나는 그냥 나 답게 살고 싶어라고 온 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동구가 그 때의 나를 대신해 내 속마음을 외치는 것 같았다. 당시의 나는 대학 졸업 후에 ‘무엇’이 되어야만 하는 그 자연스러운 과정을 앞에 두고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지만 이미 지쳐있었다. 입사 하고 싶은 회사 리스트, 그리고 그 곳에 입사하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들을 빼곡하게 정리한 친구나 선배들의 노트를 봐도 도저히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정말 너는 이게 되고 싶은거야? 우린 졸업하면 뭐가 되어야만 하는걸까? 라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취업에 매우 진지한 친구에게 이런 질문을 함부로 던질 순 없었다.

        중고등학생 시절부터 나는 장래희망을 묻는 질문에 잘 대답하지 못했다. 그 질문에 대답하기 이 전에 먼저 질문 해야 하는 것들이 나에겐 중요했다. 내가 지속적으로 혼자 하던 고민은 보통 ‘어떻게’ 와 ‘왜’ 이다. '무엇'은 그 다음 문제.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어떤 어른이 되고 싶은가, 경제적 독립 이외에 내가 일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가 등등...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갖게 된다면 난 내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분명해 질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내가 추구하는 가치를 계속 이어나가기 위한 방법은 무궁무진할 것이기에 가질 수 있는 직업도 더 폭넓어 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혹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찾게 된다면 어떤 일을 해도 상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와 기준들은 찾아 내 삶의 태도에 반영이 되고 그러한 태도를 갖게 된다면 무슨 일을 하던 밥벌이만 할 수 있으면 그만인 것이다.

        천하장사 마돈나를 보던 그 시절의 나는 아직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열심히 찾고 있었다. 동구처럼 나도 뭐가 되는 것보다 먼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었다. 어느 정도의 답을 스스로 찾았을 때쯤 나도 본격적으로 취업 준비를 하게 되었다. 나를 꽤 중심에 두고 취업 준비를 했지만 철저히 대학 시절 누가 더 많은 성과를 만들어내고 소유했는지를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시스템 앞에 나는 여전히 무력감을 느꼈다. 한국 특유의 공채 시스템 안에서는 동일한 평가 기준을 반영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말한다. 입시부터 취업까지 나아가야 하는 방향은 하나이고 평가 기준도 동일한 사회에서 나는 영원한 제로섬 게임에 갇힌 것 같았다. 정해진 제로섬 안에서 내 마음은 항상 초조했고 불안을 이기는 방법은 시스템에 순응하는 것이었다. 언제까지 이 프레임 안에 갇혀 살아야 할까?





        뉴욕은 너무나 다양한 인종과 나라에서 이민 온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이고 이 환경적인 요인 때문에 끊임없이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밖에 없다. 한국과 비교하면 뉴욕에는 주변에 나와 다른 사람이 상상초월 많아서 내가 원래 어떤 사람인지 훨씬 잘 보이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혹은 정 반대로 너무나 다양한 종류의 뉴요커들을 만나면서 그 만남을 통해 나 스스로도 몰랐던 내 모습을 발견하는 경우도 있다.

        새로운 문화권에서 이방인으로 살게 되면서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하고 성과를 내야하는 삶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것 같았다. 대신 내가 누구인지, 어떤 취향을 가진 사람인지, 내 배경이 되는 문화권이 너네와 어떻게 다른지를 더 촘촘히 고민하고 나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하는 것이 더 우선시 되었다. 미국은 여전히 인종차별이 존재하고 백인 우월주의가 문화 전반적으로 깔려 있어서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자기 색깔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이 백인 우월주의에 나도 모르게 휩쓸리게 된다. 이 사회의 주류는 여전히 백인 남자 문화이고 내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혹은 성공을 하기 위해 그 문화에 휩쓸리기 쉽다. 미국에서는 보통 이런 과정을 whitewashing 이라고 부른다. 유색 인종들이 주류 사회에 입성하기 위해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와 정체성을 숨기고 백인 문화를 흡수하는 것이다. 내가 만난 많은 유색인종 뉴욕커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아시안 친구들은 우리가 가진 공동체 주의, 상대방에 대한 배려심을 미국 업무 문화에 어떻게 녹일 수 있을지 고민하고 애썼다. 히스패닉과 흑인 친구들로부터는 어떤 순간에도 여유를 가지고 유머를 날릴 수 있는 예술가의 마음을 배웠다. 그리고 LGTBQ 친구들은 터부시 되는 선을 과감히 넘어버리는 용기를 나에게 가르쳐 줬고, 가장 자기 다운 모습으로 살 때 인간이 얼마나 아름다워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온전한 자신으로 아름답게 사는 인간을 보게 되면 나는 그 삶을 응원해 줄 수 밖에 없고 그들이 그 길을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해 도와주고 싶다.

        사이다 같은 작지만 큰 에피소드가 있다. 회사에서 협업 차원으로 다른 팀 미팅을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 미팅 참여자 중 가장 직급이 높은 40대 초반의 남자 디렉터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가지고 와서 전반적인 배경 설명을 해주는데 주니어 여자 직원들에게 너무 기본적인 설명을 하면서 마치 아직 너넨 이것도 모를테니깐 하는 태도. 그리고 중간급 매니저 여자 직원이 하는 말을 듣고 똑같은 말을 마치 자기가 처음하는 것처럼 반복하는 것이었다. 처음으로 참가하는 다른 팀 미팅이었기 때문에 속으로 이 팀은 분위기가 왜 이런가 혼자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팅이 끝나고 나서 중간급 매니저 여자 직원 2명이 그 남자 팀장에게 좀 남아보라고 하더니.. 너 방금 미팅에서 계속 mansplaining 한거 알아? 정확히 이런 걸 보고 mansplaining라고 한단다라고 피드백을 주는 것이다. 그랬더니 그 남자 팀장은 “오, 내가 그랬었나?” 하면서 미안하다고 했다. 세상에나 역시 이런 것이 가능한 곳도 있구나 싶었다. 물론 그 남자 팀장이 진심으로 반성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할 말은 하고야 마는 그 언니 2명을 보면서 (실제론 물론 다들 동생! 하지만 멋있으면 다 언니!) 내가 용기를 내고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곳이 어느 방향인지 알게 되었다. 속으로만 그 언니들에게 박수를 치는 것이 아니라 잘 알지도 못하는 그녀들의 데스크로 가서 너네 진짜 진짜 멋있었어. 너네 말이 100% 다 맞았다고 주변 사람 다 들리게 인사를 하고 왔다.

        가시적인 성과에 집중하다 보면 우리 모두가 정해진 파이 안에서 서로에게 부대끼며 세상이 점점 작아지는 느낌이었다. 더 소유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추구하는 가치를 존중하고 서로 지지할 때 비로소 제로섬 게임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작은 파이에서 벗어나 무한대로 넓어진 세상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친구들에게 진심으로 내 마음을 정한다. 그 무엇보다 지금의 너라서 고마워 (Thanks for being you). 너의 목소리와 색깔을 잊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고 노력해줘서 고맙다고. 동구의 말이 맞았다. 우리는 뭐가 되고 싶은게 아니였어. 그냥 나답게 살고 싶은거지. 

11/08/2022

02 Don’t worry about your accent

 

Don’t worry about your accent

해방감을 주는 그들의 개방성

        뉴욕 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장 큰 걸림돌은 역시나 영어였다. 우리 모두 그렇게 영어에 투자하였으나 어린 시절 외국 경험이 없다면 누구나 영어 때문에 쪼그라들 수 밖에 없다. 뉴욕에 온 지 얼마되지 않아 동네 편의점에 클렌징 폼을 사러 갔는데 원하는 브랜드가 보이지 않아 직원에게 물어봤다. 하지만 그녀는 도대체 내 Cleansing 발음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녀의 표정과 나의 절망, 부끄러움, 답답함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았다. Minority가 된다는 것은 이런 것일까? 하루 아침에 상대방이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상대방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원어민처럼 영어를 하지 못하니 나의 전반적인 지적 수준까지 아주 낮아지는 기분이었다. 중학생 수준의 영어로 대화가 가능하다면 그 정도의 지적 대화만 가능하다고 생각할까? 11년 전엔 없던 말이지만 정말 현타가 오는 순간들이 뉴욕 생활 초반에 많이 있었다.

        미국에 오기 전 한국에서의 마지막 10년은 나의 10대 후반과 20대 중반이었다. 돌이켜 보면, 그 시절 나의 욕망은 아주 간단했다. 어느 정도 이상 주류의 기준에 맞추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되고 싶다가 아니라 되어야 한다가 포인트!) 모든 것을 잘하고 싶었고, 프로젝트든 조직이든 상황이든 내가 주도하고 싶었다. 아마 많은 대한민국의 청소년과 청년들이 그렇듯이 자신만의 색깔을 찾기 가장 좋을 그 시절에 나는 그 것보다 주류 사회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서 온 에너지를 집중했다.

        항상 상황을 리드하고 싶었던 욕망 덩어리었던 내가 하루 아침에 말도 못하는 바보가 되어버렸으니 그 비참함은 정말 컸다.

11/01/2022

01 First-generation college student (대학 진학 첫 세대)

First-generation college student (대학 진학 첫 세대)

노동자인 부모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아이들


어렸을 때 한 가지 바램이 있었다. 우리 아빠가 다른 아빠들처럼 그럴싸한 양복을 입고 출근한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생각했다. 나는 매사 의욕이 넘치고 착실히 열심히 공부를 하던 학생이었다. 그리고 노력한 만큼 성적도 좋은 편이었고 학창시절 내내 반장, 부반장을 줄곧 해왔다. 열심히 노력해서 하나씩 하나씩 원하는 것을 이루어 나가는 성취감을 아는 이상적인 학창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아무리 내가 노력을 해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건 나의 부모님이 봉제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라는 나의 배경이었다.

나는 일단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나의 환경을 바꿀 수 있을거라고 믿었고, 원했던대로 괜찮은 대학에 합격을 해서 부산에서 서울로 독립을 하게 되었다. 좋은 대학에만 가면 많은 것이 해결될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너무나 생소한 것이 많았다. 이제는 그런 걸 “네트워킹”을 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당시는 처음 보는 사람으로 가득 찬 장소에서 사람을 사귀고 인맥을 만들고 넓혀 나가는 그 모든 과정이 너무나 낯설었다. 한 번 만나서 1-2시간 술을 마시고 나면 절친이 되어 버리는 친구들이 있었다. 지방의 평범한 동네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보고 익힌 나의 인간관계와 대학에서 관찰한 인간관계는 너무 달랐다. 그 차이가 대학 캠퍼스에서 나를 외롭게 만들었고 마치 있으면 안되는 장소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계속 받았다.

시간이 꽤 지난 뒤에 내가 느낀 그 차이는 나의 배경 (계급)에서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노동자인 부모님을 보고 자란 나에게 비즈니스 관계, 정치적인 관계는 존재 하지 않았다. 계산적인 관계는 우리 부모님에게 없었던 것 같다. 나는 그저 진심을 다 주는 그들의 끈적끈적한 관계만 보고 자랐다. 서울 중산층 출신 아이들이 보여주는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유지하지만 매우 친한 척보이는 관계성은 내가 경험해 보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20살의 나는 이 사실을 아직 인지하지 못했었고 그저 외롭게 고립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런 나의 마음을 그 누구에게도 쉽게 나누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괴로웠던 건 끊임없이 대학 동기들의 배경과 나를 비교한다는 사실이었다. 부모님의 직업, 부모님의 학력.. 나는 어느 새 나의 과거나 배경은 없었던 마냥 살고 있었다. 내가 조금만 더 조건이 좋았더라면 이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고 있었다.

사춘기 즈음부터 15년 넘게 오랜 시간 내 마음을 짓누르는 고민이었다. 부모님의 헌신으로 이만큼 공부하고 잘 자란 걸 뻔히 알면서 마음 한 쪽으로는 그것을 부끄러워 한다는 사실. 결혼하고 뉴욕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고 아이를 낳고 살면서도 마음 구석에 숨겨놓고 꺼내 보지 않았던 해결하지 못한 나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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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직장동료 E가 새로운 봉사활동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뉴욕 시립 대학교 (CUNY: City University of New York) 의 "First-generation college student (대학 진학 첫 세대)" 의 멘토가 되어 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First-generation college student?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말 그대로 직계 가족 (부모, 형제) 중에서 처음으로 대학에 진학한 학생들을 가르키는 명칭이다. 그리고 이는 나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30살이 넘어서야 이 개념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이름을 붙여주고 개념을 만드는 일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느꼈다. 이렇게 이름을 붙여주는 행위 하나 만으로 숨기기만 했던 나의 정체성 중 한 부분이 다시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었다.

뉴욕의 CUNY 뿐 만 아니라 미국의 많은 대학에서는 first-generation 학생들에게 오래전부터 지원을 하고 있었다. 대학 졸업장이 있는 부모를 둔 중산층 가정 출신의 학생들은 대학에 입학하기 전 부터 부모를 통해 많은 정보와 작은 팁들을 얻을 수 있다.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대학을 통해 누릴 수 있는 문화적 혜택과 기회를 들어왔기 때문에 준비가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미국이라고 다르지 않다. 여름 방학 인턴 자리를 얻기 위해 부모님을 통한 네트워킹은 미국 중산층 가정에서 아주 흔한 일이기도 하다. 이와 비교하면 first-generation 학생들의 출발 지점은 너무나 다르다. 리소스의 접근성이 상대적으로 너무 좋지 않다는 것을 사회가 인지하고 이 학생들을 위한 멘토링 프로그램을 비롯해서 더 많은 오리엔테이션을 제공한다. 동료 E도 역시 first-generation 대학생이었고 그녀는 자기가 멘토를 통해서 받았던 정서적 지지와 실질적 도움을 다시 돌려주고 싶어 했다. 실제로 이 멘토링 서비스의 멘티였던 학생들이 졸업 후 멘토로 돌아오는 비율은 굉장히 높다고 했다.

나는 이 특정 그룹 학생들이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커뮤니티와 대학의 공식적인 서포트 이야기를 들으면서 머릿 속에서 띵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생기는 분노와 고민을 개인의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신과 같은 상황에 처한 친구들과 연대를 이루고 더 큰 사회적 시스템 안에서 자신들의 문제를 설명하고 이해하려 했다. 그리고 출발선이 아예 달랐던 자신들에게 더 많은 서포트가 필요하다고 하나의 목소리 만들어 사회에 요구했다.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 만으로도 외로웠던 대학 시절의 내가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다.

내가 이 그룹에 관심을 보이자 E는 우리 오피스에 first-generation college student 출신의 인턴과 직원들의 소모임이 있다고 알려줬다. 아직 대학에 재학 중인 인턴부터 시니어 레벨에 있는 매니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동료가 있었고, 내가 사는 곳이 뉴욕임을 증명하듯이 대부분 이민자 가정에서 자란 친구들이었다. 아이티, 인도, 자메이카, 벨라루스.. 그 들의 부모는 다양한 곳에서 뉴욕으로 이민을 와서 이 아이들을 키웠다. 그들의 모임은 그야말로 축하, 성취감, 자랑스러움을 가득 차 있었다. 특히, 아직 대학에 재학 중인 인턴 아이들은 본인 스스로를 product of my parents’ labor이라고 표현했고 자신의 환경이 자기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얼만큼 크게 영향을 키쳤으며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결정할 때도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에게 부모님의 노동은 고생스러웠지만 그 어디에 내어 놓아도 당당하고 떳떳한 자랑이었다. 그리고 인턴 친구들은 말했다. 이런 모임이 없었더라면, 자기도 이렇게 생각하지 못했을거라고.

나는 너무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난 왜 우리 부모님의 고생스럽지만 떳떳했던 노동을 부끄러워했던 것인가. 모임 후, 동료 E가 나에가 말했다. “수진, 너 정말 멋있고 잘하고 있어.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는 이 터프한 뉴욕에 와서도 이만큼 다 이루었잖아. 너의 부모님을 만나보지 못했지만 너만큼 멋있는 분들일거라고 생각해. 우린 항상 이렇게 하나씩 우리가 이루어왔잖아.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던 우리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이 모임의 친구들은 내가 오랜 시간 숨기고 있었던 내 마음을 즐거움과 웃음으로 위로해줬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니 단순히 내가 어리석기 때문에 노동자인 내 부모님을 부끄러워 했다고 결론내고 싶지 않았다. 물론 나의 어리석음은 인정하고 반성한다. 하지만 노동자인 부모님을 부끄러워하는 아이들이 나 하나가 아니라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면, 이건 개인의 어리석음을 넘어서는 문제이다. 한 사회가 노동자를 어떻게 인식하고 대접하는지를 살펴봐야 하고 출발선이 다른 아이들과 청소년들에게 성공하고 싶으면 너가 알아서 죽도록 노력해라고 말하는 사회는 과연 옳은 사회인가를 질문해야 한다. 이런 사회에서 우린 어떻게 내 환경과 부모의 노동을 자랑스러워 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뉴욕의 작은 이 모임에서 만난 이민자 가정 출신의 친구들을 통해 개인적인 위로를 받았고, 사회적인 해결 방안의 시작도 보았다. 이 친구들도 나와 똑같이 불평등에 대한 분노와 자신의 배경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었다. 하지만 그 문제를 자기 개인의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신과 같은 상황에 처한 친구들과 연대를 이루고 더 큰 사회적 시스템 안에서 자신들의 문제를 설명하고 이해하려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불리했던 배경을 부끄러움으로 받아들이지 않게 그 것을 딛고 만들어낸 성취를 더 자랑스러운 결과물로 축하해주는 사회적인 지지와 문화였다. 나도 이 만남을 통해 진심으로 내 삶을 자랑스러워하고 스스로 축하할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숨길 것도 없었고 비로소 온전히 조금 더 내 자신으로 더 당당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 뉴욕이 나에게 준 큰 선물 중에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