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하는 이 곳, 뉴욕
2020년 3월 12일 목요일, 회사에서 당장 내일부터 원격근무를 시작한다고 알렸다. 2월 29일 뉴욕에서 처음으로 코로나 확진자가 나타났지만 마지막 출근일까지도 나는 잠깐 지나가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한달 정도 지나면 다시 출근할 수 있겠지하고 동료들과 웃으면서 퇴근을 했고, 원격으로 회사 컴퓨터 접속은 잘 될까 정도만 걱정했다. 그리고 삼일 뒤 15일 오후에 뉴욕 시장이 모든 학교 수업을 원격으로 전환한다고 기자회견을 하면서 세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 3/17/2020: 뉴욕시 모든 음식점과 술집 영업 금지 (배달만 가능)
- 3/22/2020: 뉴욕주지사의 이동제한령 시작
- 4/11/2020: 뉴욕시 코로나 하루 사망자 775명
- 6/24/2020: 뉴욕시 코로나 총 사망자 22,934명/ 확진자 227,517명
- 7/6/2020: 레스토랑 outdoor dining 만 영업 가능
정부의 대응 타임라인만 보면 2020년 여름부터 뉴욕의 상황이 조금 나아졌겠구나 싶지만 실제로 그 여파는 훨씬 더 심각하고 컸다. 우리 가족은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한 이 후 첫 외식을 2021년 6월에 했다. 약 1년 3개월동안 집밥과 배달음식만 먹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미국은 9월부터 새학기가 시작하는데 2020년 9월에 개학할 때 부모에게 선택의 기회를 넘겼다. 옵션은 100% 원격 아니면 하이브리드. 우리 가족은 100% 원격을 선택했고 이 얘기인 즉슨, 우리 아이들은 2020년 3월 중순에 원격 수업을 시작해 2021년 9월까지 1년 6개월을 학교에 단 하루도 등교하지 않았다. 우리 가족이 특별한 케이스는 아니다. 많은 가족들이 우리와 같은 선택을 했고 한국보다 훨씬 더 팬데믹의 여파가 심했다.
이렇게 기나긴 고난의 시간이 시작될 지 그 3월에는 몰랐다. 하루 아침에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되서 오히려 일상은 차분해지고 조용해졌다. 느긋하게 일어날 수 있었고 천천히 아침 커피를 마실 수 있었고 아이들과 긴 아침 식사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우리집 밖 현실은 완전히 달랐다. 3월부터 5월까지 뉴욕의 봄은 끔찍하고 잔혹했다. 뉴욕은 코로나 앞에서 처참하게 무너졌다. 서너달의 짧은 시간동안 이 도시는 약 2만 5천명 정도의 사람을 잃었다.
출처: https://www.nyc.gov/site/doh/covid/covid-19-data-totals.page
4월 초중순에는 뉴욕시에서만 하루 사망자가 800명이 넘게 나왔다. 집 밖으로 단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하루종일 집에서 아이들과 부대끼며 살 때 정말 몇 분에 한 번씩 앰뷸런스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살면서 그렇게 사이렌 소리를 자주 들어본 적이 없다. 그 때 잠자리에 누우면 아이가 귀를 막으면서 말했다.
“엄마, 귀에서 계속 앰뷸런스 소리가 울려”
환청이 들리는 것이다. 하루에 수 십번 그 소리를 들으니깐. 그러면 아이를 꼭 안아줄 수 밖에 없었다. 나도 똑같이 그런 환청이 들렸다. 그래서 내일은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실려가고 죽을까 무서웠고 나도 무서워서 아이를 꼭 껴안을 수 밖에 없었다. 아이에겐 희망을 갖고 말했다. 내일은 조금 더 괜찮아 질거야. 내일은 사이렌 소리가 조금 덜 들릴거야.
나는 뉴욕시청에서 일을 하는 공무원이라서 이 시기에 코로나 대응 업무에 자주 긴급 투입 되었다. 기존에 내가 하는 업무랑 전혀 관계가 없었지만 당시엔 평일, 주말 가릴 수 없이 온갖 새로운 일을 해보았다. 당시 너무 많은 코로나 환자가 병원으로 쏟아져 들어와서 뉴욕 주 지사 였던 Andrew M. Cuomo가 기자회견에서 미국 전역의 의사, 간호사들에게 뉴욕에 와서 도와 달라고 호소를 했다. 기존 인력으로는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당시 뉴욕시 모든 병원 응급실은 일분 일초를 다투고 있었고 단 하나 남은 산소호흡기를 누구한테 먼저 주어야 하는지를 의사가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기자회견이 방송되고 나서 전국에서 정말 수 많은 의료 종사자들이 지원을 했다. 내가 당시 담당했던 일은 뉴욕에 와서 돕겠다고 한 의료 종사자들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뉴욕시에서 운영하는 뉴욕 시립 병원에 와서 일을 할 수 있는지 의사를 묻고, 만약 올 수 있다고 하면 그 자리에서 뉴욕 시립 병원 시스템에 그 분들의 정보를 입력하는 일이었다. 이름, 의사 면허 번호, 현재 근무지 등등 기본적인 정보를 병원 시스템에 넣어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현장에 투입 될 수 있도록 서류 작성 시간을 단축하기 위한 일이었다.
이 일을 하면서 나는 거의 100명 가까운 의료 종사자들과 통화를 했다. 모든 분들이 정말 진심으로 이 도시를 걱정하고 있었고 놀랍게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곳에 와서 일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 뉴욕의 응급실이 어떤 상태일지 뻔히 알면서도 기꺼이 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게 감동에 감동을 더하는 통화를 계속 이어나가다가 어떤 한 분과 통화를 하게 되었다. 내가 전화를 걸게 된 배경과 이유를 설명하자 한 신사분이 이렇게 대답하셨다.
“Thanks for calling me. I have lived in this City my entire life. I’m a retired emergency doctor, and I’m ready to go to any emergency room right now. However, I’m 83 years old, and my family disagrees with my decision. I first need to convince my wife, kids, and grandchildren, and then I’ll call you back. Please give me a few hours.”
전화기 너머로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한 동안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만약에 이 할아버지가 나의 할아버지라면 나는 아마 절대 무조건 반대했을 것이다. 노인에게 가장 치명적이고 아직 백신도 없는 상황에서 우리 할아버지가 코로나 환자로 가득한 응급실에 간다고?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런데 할아버지 목소리에는 힘이 가득 차 있었다. 절대 이 도시가 이렇게 무너지는 걸 바라볼 수 없다는 듯이.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들을 살리고 다시 일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얼굴도 본 적 없는 할아버지와 통화를 하는 내내 핸드폰 너머로 우리의 마음이 다 연결된 것 같았다. 이 도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래서 지금 얼마나 절망적인지, 하지만 우린 반드시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확신까지.. 마음으로 다 느껴졌다.
사람 간의 관계도 함께 역경을 겪고 나면 그 관계가 더 깊어지듯이 나도 역사에 남을 팬데믹을 뉴욕에서 보내면서 이 도시와의 관계가 한층 더 깊어진 듯 하다. 영화 속 고담씨티 같았던 텅 빈 5th Avenue와 타임스퀘어를 보면서 믿을 수가 없어 정말 눈물이 찔끔 나올 뻔 했다. 내가 사랑하던 이 도시의 활기, 에너지, 그 카오스가 다시 살아나길 간절히 바랬다. 그리고 많은 뉴요커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다시 이 도시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은퇴한 80대의 그 의사분처럼.
자신이 사는 곳에 이토록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은 전 세계에 얼마나 될까? 그 중 최고봉이 뉴요커라고 생각한다. 두 팔 활짝 벌려 나를 환영해 준 이들, 있는 그대로 내 모습의 가치를 믿는 사람들, 이 도시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그 자부심을 지키기 위해 자기 비판에도 열린 사람들. 내 머릿 속에 그려지는 뉴요커이다. 그리고 나도 이런 뉴요커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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